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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인간은 기능(Functionality)을 기술(Technology)로 대체해 왔다. 즉, 인류 기술의 발전은 기술을 만드는 내재적인 상위 기능 하나만을 남긴 채 나머지는 모두 외재화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유구한 전통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먼 과거의 예를 들자면, 촘촘한 털과 두터운 발바닥 가죽은 따뜻한 옷과 튼튼한 신발로 대체되었으며, 좀 더 현대로 오자면 오래 걷고 달리는 기능은 자동차로 대체되었다. 보다 최근에 이르면 인간은 전화번호를 외우는 능력을 핸드폰에게 이양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은 대체된 기능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을 피해 왔다. 자동차가 발명되었지만 인간은 여전히 건강을 위해 걷고 달린다. 걷고 달리는 행위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이동을 위한 행위가 이제 건강 유지를 위한 행위로 바뀌었다. 따뜻한 옷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조금만 추워도 과도하게 따뜻하게 껴입는 것보다, 계절의 변화를 몸이 느낄 수 있도록 적당히 옷을 입는 것이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다.

인공지능, 정확히는 대형 언어 모델(LLM, 이하 언어모델)의 등장 이후, 인류는 이번에 글쓰기의 기능을 기술로 대체하는 중이다. 버튼 하나 딸깍하면 에세이가 튀어나오고, 책 제목만 말해줘도 독후감 한 편이 뚝딱 나온다. 최근에는 기술이 너무 발달하여 적당히 그럴듯한 글을 써야 할 때는 언어모델이 작성한 글을 있는 그대로 가져다 사용해도 될 정도이다.

나의 경우도 최근 대부분의 글을 언어모델의 도움을 받아 쓴다. 언어모델로 글을 쓴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통으로 작성하기와 자동 완성하기이다. 통으로 작성하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ChatGPT등의 챗봇에게 이런저런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완성된 글을 한 번에 받아보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업무용 이메일이나 공지사항 등 문장력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글의 경우 이렇게 작성한다. 자동 완성 방식은 사람이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고 그 뒷부분을 짧게는 문장 단위, 길게는 문단 단위까지 언어모델이 완성해 주는 방식이다. 내 경우, 좀 더 공들여 써야 하는 글을 쓸 때 자동완성 방식을 사용한다. 앞의 내용이 적당히 있는 상태라면 “그러나”, “따라서”, “더 나아가” 등의 연결어만 써도 뒤에 나올 법한 내용을 정말 그럴듯하게 써 준다. 이렇게 상시 언어모델의 도움을 받다 보니, 이제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완성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체감한다.

그런데 인류가 글쓰기 능력을 상실해도 되는 것일까? 우선 답은 아니다. 글쓰기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자료도 인터넷에 널려 있기에 굳이 여기에 다 소개하지 않겠다. 다만 개인적으로 경험한 글쓰기의 효능 및 필요성을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글쓰기는 느낌과 상징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마치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명료하고 인과가 자연스럽지만 꿈에서 깨면 그야말로 개꿈인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막상 글로 옮기려고 하면 얼마나 허황되고 공백이 가득한지 알게 된다. 즉, 글쓰기는 우리의 생각을 검증할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 능력을 상실하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과도 같다.

언어모델의 시대에도 인간은 글쓰기를 연습해야 한다. 우리 연구실의 경우, 석사든 박사든 입학 후 2년은 격주로 3-4개 문단의 글을 쓰는 훈련을 거친다. 첫 1년은 한국어로, 그 이후는 영어로. 또한 글을 쓸 때에도 몇 가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각 문단은 두괄식으로 구성되어 문단의 첫 문장들만 읽어도 글의 전체 내용이 파악되어야 한다 (이 글도 그렇게 작성하였다). 나는 21년도에 입학한 이후 2년간 훈련을 받았고, 그중 한국어로 쓴 글은 이 블로그에도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기간이 끝난 후 언어모델 시대가 도래하였고 잠깐 넋을 놓은 사이 간신히 쌓아온 기본적인 글쓰기 능력도 서서히 퇴화하였다.

따라서 나는 글쓰기 재활훈련의 일환으로 월간 글쓰기를 시작하려 한다. 계기는 정말 사소했다. 이번 달 초, 여러 연구실이 참여하는 과제의 워크숍에서 유신 교수님 연구실의 대학원생들과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뜨거운 불판 위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요즘 언어모델의 능력이 너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던 중, 글쓰기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알고 보니 우리 모두 언어모델로 인한 글쓰기 능력의 상실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때 누군가 글쓰기 모임을 제안했고 (내가 제안한 것 같긴 한데, 확실치 않다), 나를 포함해 그 테이블에 있던 4명 모두 마음이 동해 단박에 월간 글쓰기 모임이 결성되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자유 주제, 제로 AI, 매달 1일까지 한 편. 바로 이 글이 월간 글쓰기의 일환으로 작성한 첫 번째 글이다. 글쓰기 재활훈련의 첫 글은 마땅히 글쓰기에 관한 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블로그에 앞으로도 최소 한 달에 한 편씩 글이 올라오길 응원해 주시길.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생각하는 능력을 사수하기 위해 가끔씩 짧게라도 글을 써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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