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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연구 윤리. 많이 들어본 단어이다. 교육도 많이 받는다. KAIST의 경우 대학원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온라인 교육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교육의 경우 악의적 부정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도 연구 윤리 하면 실험 결과 조작, 표절, 연구비 횡령 등과 같은 부정 행위를 떠올렸다. 하지만 연구 윤리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개념이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해외 학회에서 만났던 두 연구자로부터 느꼈던, 그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연구 윤리의 예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로서는 평소에 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에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신선한 시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 연구자는 편의상 A, B로 표기하겠다.

저자 의식

A를 처음 알게 된 건 논문 발표 세션에서였다. 내가 발표한 논문과 유사한 주제의 논문 발표였고, 발표도 잘 해서 기억에 남았다. 마침 그날 저녁 포스터 세션에서 A가 해당 논문의 포스터 발표를 하고 있길래 미처 못 물어봤던 질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가고 친밀감이 생겨 농담을 했다. 발표도 해놓고 포스터 세션까지 하다니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냐고. A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웃으면서 자기도 안 하고 싶은데 지도교수가 시켜서 한다고 했다.

그런데 A는 이 논문의 8 저자였다. 앞의 저자들이 모두 중국인이었고 정황상 비자문제로 아무도 못와서 A가 대신 온 것 같았다. 사실 보통 2 저자만 돼도 1 저자의 사정 때문에 억지로 발표를 맡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8 저자가 발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반쯤 농담처럼 어쩌다가 네가 발표를 하게 되었냐 물었는데, 이번에 A는 웃지 않고 담담히 포스터에 8번째로 들어간 자신의 이름을 가리키며 “여기 내 이름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 순간 A가 연구 윤리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확 느껴졌다. A는 저자 순서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논문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었고, 진심으로 ‘자기 연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발표를 맡게 된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던 거다.

사실 나에게는 부끄러운 기억이다. 당시 내가 2 저자로 참여하고 있는 연구가 있었는데, 나는 A보다 더 낮은 수준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2년전 경험인데, 아직도 자기 이름을 가리키던 A와 그 멋있는 멘트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심사 공정성

B는 내 논문 발표 세션의 청중이었다. 발표를 마치고 내려온 뒤, 옆에 앉아있던 모르는 사람이 대뜸 발표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는데 그게 B였다. 그날 밤, 학회 메신저 앱을 통해 B가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내 논문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며 다음 날 점심에 만나자고 했다. 질문은 간단한 거라 금방 답했는데, 만난 김에 서로 어떤 연구 하고 있는지도 얘기 나누게 됐다. 이야기는 B의 최신 연구로 흘러갔는데, 얘기를 꺼내기 전에 내가 혹시 C 학회의 심사위원인지를 물었다. C 학회는 B가 최근에 논문을 제출한 학회였다. 나는 고작 박사 1년차 학생이라 당시에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 지 의아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B는 습관처럼 확인을 먼저 하고 자신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심사위원일 가능성이 너무나 적은 나에게조차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니 B는 평소에도 심사의 공정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조심했을 것이다. 나는 학회에서는 마냥 자유롭게 내 연구 이야기를 떠벌릴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마치며

A와 B가 보여준 연구 윤리는, 그들에게 전혀 특별하거나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생각해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몸에 밴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너무나 당연한 듯, 무심한 듯. 그 자연스러움이 멋있었다.

이런 태도는 어디서부터 비롯됐을까? 개인적으로는 A와 B가 속한 연구실의 문화가 큰 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문화가 그대로 스며들었고, 그게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나도 우리 연구실의 일원으로써 멋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가꾸고, 또 누군가의 귀감이 되는 연구자가 되기로 다짐해본다.